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나카 고이치 (문단 편집) == [[노벨화학상]] 수상 == 2002년 10월 9일 수요일 오후에 다나카 고이치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. "지금부터 약 15분 뒤에 외국에서 중요한 전화가 걸려올 테니 받아 주세요"라는 전화가 왔다. 조금 뒤 외국에서 [[영어]]로 전화가 걸려왔는데, 통화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. '해외에서 주관하는 상을 받게 되다니 영광이군. 설마 [[노벨상]]이 '''그 노벨상'''은 아닐 테고, '노벨'하고 [[이그노벨상|이름이 비슷한 상]]이 또 있던가?' 속으로는 동료들의 [[몰래카메라]]가 아닌가 상상도 했다. 그가 통화를 마치자마자 [[시마즈 제작소]]의 회사 [[전화기]] 50여 대가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. 그는 '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' 의아해하며 다시 전화를 받았다. 다나카 고이치를 찾는 전화였다. 그는 그때까지도 상황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"글쎄요,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"라며 전화를 끊었다. 회사에는 '다나카 고이치'라는 [[동명이인]]이 3명이나 있었다. 수상자 발표 직후 회사에 기자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는데 회사에서도 문의전화에 '잘못 아신 게 아니냐'라고 되물을 정도였고, 일본에서도 '우리나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온 건 잘됐는데, '''도대체 '다나카 고이치'란 사람이 누구야?''''라며 어리둥절했다. 심지어 [[가족]]들조차도 갸우뚱했을 정도. 가족들은 동명이인으로 착각한 거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. 본인임이 확인된 이후에는 말 그대로 '''눈 뜨고 일어나니 [[스타]]'''가 되었다. 모교 도호쿠대학으로부터 [[명예박사]] 학위가 날아들고, 쏟아지는 강연 요청, [[인터뷰]] 요청에 파묻혀 일을 못 하고, [[양복]]이 고작 2벌뿐이라서 새 걸 사러 갔다가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인 요청 공세를 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질 않나, 그의 노벨상 수상으로 다니던 직장도 덩달아 엄청 유명해지고 주가도 불과 9거래일 만에 261엔에서 475엔으로 수직상승했다.[* 시마즈의 주가는 중간중간 부침은 있었지만 이후로도 꾸준히 올라 [[10루타]]를 달성하고 2021년에는 5,500엔을 넘기기도 했다. 참고로 신입사원 입사 희망자도 폭증했다 한다.] 덕분에 사장에게 당장 이사로 승진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는데 겨우 사양해서 부장으로 승진하기도 했다. 그 대신 회사에서는 바로 다음 해에 상술한 다나카 고이치 기념 연구소를 설립해 소장(집행임원 대우) 자리에 앉혀버렸다. 이 해에 다나카 외에도 [[일본인]] 노벨상 수상자가 또 있어서 일본 입장에서는 겹경사였지만[* [[고시바 마사토시]]가 [[노벨물리학상]]을 수상했다. 같은 분야를 연구한 레이먼드 데이비스 2세(미국), 다른 분야 업적의 리카르도 자코니(이탈리아)와 공동수상.] 이쪽 소식은 상대적으로 묻혀버렸을 정도였다(...) [[파일:external/www.asahi.com/sya110a.jpg|width=300]] 위 사진은 회사에서 마련한 수상자 인터뷰 장면으로 작업복 차림으로 나와서 화제가 되었는데, 막상 본인은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로 정장을 미처 못 챙겼다고 몹시 송구스러워했다. [[파일:external/www.nobelprize.org/tanaka_prize_photo.jpg|width=300]] 노벨상 시상식에서의 모습. 이때는 물론 예복을 차려입었다. 실제로 인터뷰 등을 보면 굉장히 겸손한 사람으로, [[대학]] 시절에도 그다지 두각을 보이는 학생은 아니었다고 한다. 노벨상 수상 이후 언론에서 그의 대학 은사를 찾아갔지만 교수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을 정도.(출처: <멋지다 다나카>)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